2008.07.04 11:28

'소리 없는 쓰나미' 지구촌 식량위기 한국도 덮치나(시사IN 42호)

한국에서도 식량위기론이 떠오르는 가운데 간척지 개발, GMO 활용을 확대해 식량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그러나 반발하는 주장도 만만치 않아 사회 갈등이 예상되는데...

세계 곡물 가격이 급등하면서 한국에서도 ‘식량 안보 위기론’이 확산되고 있다. 정부나 전문가들은 한국도 식량 안보 위협에서 자유롭지 않다며, 대안 찾기에 나섰다. 6월24일,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연구원이 ‘위협받는 식량안보, 대안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개최한 심포지엄도 대안 찾기의 일환이었다. 식량 안보에 대한 최근 관심사를 반영하듯, 이날 심포지엄에는 학계·기업·정부 전문가 300여 명이 참석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국제 곡물시장의 최근 흐름을 보면, 심상치 않다. 2005년 이후 밀·옥수수·쌀·대두 등 국제 곡물 가격은 거의 두 배로 뛰었다(표 참조). 바이오 에너지용 곡물 수요가 증가하고, 중국·인도 같은 나라들의 경제가 발전하면서 식량 수요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수요는 늘어났지만 지구 온난화에 따른 기상이변이 잦아지면서 곡물 작황은 부진해졌다. 공급은 오히려 전보다 악화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투기 자본까지 가세해 곡물 가격 상승을 부채질한다. 농림수산식품부 여인홍 팀장은 “특히 2007년부터의 곡물 가격 급등은 수급 불균형보다는 투기 자본의 영향이 더 크게 작용한다는 분석도 있다”라고 말했다. 시카고 선물거래시장의 곡물 월평균 거래량은 2003~2007년 기간 중 증가했다. 밀과 옥수수는 각각 30%, 콩은 15%가량 거래량이 늘었다. 투기 자본이 가세한 때문이라는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도 2007년도 소맥 가격상승 원인 가운데 48%가 투기에 의한 것이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국제 곡물 가격이 급등하다 보니, 남미와 아프리카, 아시아 20여 국가에서는 식량 가격상승에 항의하는 시위와 폭동이 잇따라 발생했다. 인도·아르헨티나·중국 등에서는 자국의 식품 가격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수출세를 부과하고 수출할당제를 실시하는 등 수출 규제를 강화하는 추세다. 이참에 자국의 이익을 확대하기 위해 태국 같은 쌀 수출국 사이에서는 ‘쌀 카르텔 설립’과 같은 논의도 진행 중이다.

게다가 세계 곡물 가격은 앞으로도 계속 오를 수밖에 없다는 전망이 대세를 이룬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2008~2017년 농업전망 보고서>에서 주요 곡물 가격은 당분간 높은 수준을 유지할 것이고, 정점에 도달한 뒤 하락세가 천천히 나타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앞으로 10년 동안의 곡물 평균 가격은 지난 10년간 평균보다 높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밀과 옥수수는 명목 가격으로 40~60%, 대두는 60% 이상 높게 유지될 것으로 전망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김용택 박사는 “이 보고서는 종전의 보수적인 전망과 달리 상당한 우려를 표명했다. 보수적이었던 국제기구마저 세계 식량가격이 급등할 가능성이 있으며 나라마다 식량 위기에 대한 압박이 커질 것임을 경고한 것이다”라고 해석했다. 유엔 세계식량계획(WFP) 조셋 시런 사무총장은 현재의 식량 부족은 식량수입국, 개발도상국, 저소득층, 취약 계층에 쓰나미와 같은 심각한 위기를 가져다준다며 ‘소리 없는 쓰나미’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한국은 그동안 곡물 파동에서 비켜서 있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급격한 애그플레이션이 일어났지만, 한국은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가장 큰 이유는 주식인 쌀 자급률이 높기 때문이다. 한국은 쌀 자급률이 98%에 달해 국제 쌀값 상승이 국내 쌀값 및 수급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그렇다고 곡물 파동을 ‘강 건너 불구경’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다. 한국은 해마다 1400만t을 수입하는 세계 5위의 곡물수입국이다.  FAO 통계를 기초로 살펴보면, 인구 4000만명 이상 OECD 국가 가운데 식량자급률이 20%대인 나라는 일본과 한국뿐이다. 선진공업7개국(G7) 중 일본을 빼고는 식량자급률이 100%를 넘지 않는 나라가 없다. 한국의 식량자급률 27%는 그나마 쌀 자급률이 높기 때문이다. 쌀을 빼면 주요 곡물자급률은 5%에 불과하다. 2006년 기준으로 볼 때 주요 곡물의 자급률은 보리 46%, 밀 0.2%, 옥수수 0.7%, 콩 9.3%로 보리를 제외하고는 거의 수입에 의존하는 처지다.

한국은 곡물 대부분을 미국 등 4개 국가에서 들여온다.

게다가 수입국도 몇 개 나라로 한정돼 있다. 수입 곡물의 84%는 미국·중국·호주·캐나다에서 들어온다. 중국은 이미 수출 제한을 시행하고 있고, 호주는 가뭄으로 수출 물량이 크게 줄었다. 미국도 갈수록 곡물의 바이오 연료 수요가 늘어나 수출 물량이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이처럼 소수 국가에 곡물 수입 대부분을 의존하는 한국의 경우는 식량 안보주의가 떠오를 경우 타격이 더 클 수밖에 없다. 농촌경제연구원과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밀·옥수수·콩 가격이 동시에 100% 상승하면 국내 소비자물가는 약 0.7% 오른다. 한국도 식량 안보와 애그플레이션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인 것이다.

서울대에서 열린 식량안보 심포지엄에서 제시된 식량 위기 극복 대안은 국내 생산을 늘리고, 적정량의 재고를 비축해 수입을 안정화시키고, 해외 생산기지를 확대하는 것 등을 골자로 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뜨거운 감자’가 될 만한 대안도 불거져 나왔다. 간척지 개발이나 유전자재조합작물(GMO) 활용 등이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김용택 박사는 “한국처럼 경지면적이 좁고 국내 생산비용이 높은 나라에서는 국내 생산 확대에 한계가 있다. 토지 구입이나 임차비가 싸고 인건비가 싼 나라에서 생산하여 이를 현지 판매하거나 수출하고, 일부는 국내로 반입하는 해외 농업 개발 방식이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한국농촌공사 나정우 박사는 해외 농업자원 개발은 해당국의 식량 사정이 열악해져 식량 안보를 강화할 경우에는 무용지물이 될 가능성도 있다고 반박했다. 나 박사가 내놓은 대안은 서·남해안 간척사업 등을 재개하는 것을 포함한 국내 농업 생산기반 확대 정책이다. 그는 “식량 공급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는 농경지를 확대하는 서·남해안 간척사업 등을 재개해 국내 농업 생산기반을 더욱 공고히 다져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환경문제에 대한 국민 인식 때문에 간척지 개발을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갯벌을 새로이 평가하고 분석해 친환경적으로 개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식품의약품안전청 박선희 박사는 지금 같은 식량위기 상황에서는 유전자재조합곡물이 대안이 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주장을 조심스럽게 내놓았다. 박 박사는 “세계 각국이 앞다투어 GMO를 개발하고, GM농산물 비중이 높아지는 추세에서 과학적 불확실성을 이유로 GMO를 거부하기 보다는 활용하는 방안을 현실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세계적으로 GMO 생산이 증가하는 추세다. 미국의 경우 2007년도 생산된 콩의 91%, 옥수수의 73%가 GMO다. 아르헨티나·브라질·캐나다 등도 GMO 재배 비율을 늘려가고 있다. GMO 비중이 높아지면서 GMO가 아닌 작물의 경우에는 프리미엄이 붙어 20%가량 비싸다.

박선희 박사는 “GMO가 상업화된 지 10여 년이 지났지만 안전성 평가에서 승인된 GMO가 인체에 해를 끼쳤다는 보고는 전세계적으로 없다. 식량자원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서는 GMO 등 다양한 자원의 이용 가능성을 보장할 필요가 있다”라고 강조했다. 한국 식약청은 인체 안전성 평가심사를 통해 안전성이 확인된 유전자재조합 제품만 국내에 유통되도록 하는 등 안전 관리를 철저히 하고 있다고 박 박사는 덧붙였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 곽상수 박사도 “GM 작물은 식량문제뿐 아니라 에너지문제, 환경문제, 보건문제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라며 “GM 작물은 조만간 우리의 생존에서 ‘선택’이 아니라 ‘필수’로 등장하게 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GMO도 갯벌 훼손도 OK?

그러나 식량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간척지 개발이나 GMO 활용까지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에 반발하는 시각도 적지 않다. 새만금 논쟁에서 보았듯 갯벌을 희생하는 간척사업은 엄청난 사회적 갈등과 진통을 낳을 수밖에 없다. 환경을 훼손하면서 새로운 간척지를 만드는 것보다 도심화가 진행되면서 매년 1만2000ha씩 소실되는 농경지를 지킬 수 있는 정책을 내놓는 편이 낫다는 주장도 있다. 농협경제연구소 전찬익 박사는 “국내 생산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적정 수준의 농지 확보가 중요한데, 적정 농지에 대한 논의 없이 농지 규제 완화가 진행되면 국내 생산기반이 위협받고 투기가 극심해질 가능성이 있다”라고 지적했다.  

GMO에 대한 소비자의 불안이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상황이어서 ‘GMO 활용론’도 만만치 않은 반감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높다. 지난봄까지만 해도 한국은 GM 옥수수를 사료용으로만 수입했고, 식품용으로는 들여오지 않았다. 그러나 옥수수 가격 급등을 견디지 못한 국내 전분당업체들이 지난 달부터 GM 옥수수를 들여와 전분당을 제조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324개 소비자ㆍ시민단체가 참여한 ‘GM 옥수수 수입반대 국민연대’가 들고 일어나 GM 옥수수 전분당 제조 및 사용업체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을 벌이고 있어 업체들이 곤혹을 치르는 중이다.
그러나 세계적인 식량 위기가 한국의 목줄을 당기는 상황이 와도 정부가 간척지 개발이나 GMO 활용을 밀어붙이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대다수 국민이 반대해도 끝내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한 정부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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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23 10:43

유리천장에 막힌 알파우먼, "위 아 스틸 헝그리"

'여풍당당'이라지만 한국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세계 꼴찌 수준이다. 경제 분야에서 여성 리더는 가물에 콩 나듯 배출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국내외 기업 여성 간부 104인에게 물었다.

몇 주일 전, <시사IN> 편집국 기획회의에서다. 브레인스토밍 수준의 이야기가 오가던 중, 국장이 한마디 던졌다. “요즘 여풍(女風)이 센데, 심층적으로 들여다보면 재미있지 않을까? 이러다 세상이 온통 여자들 차지가 되는 거 아닌가?” 주요 고시의 여성 합격자 비율 증가, 사회 각층에서 여성 리더 비율이 증가하고 있으니 ‘여풍당당’의 실체를 들여다보자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국장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여기자들이 반론을 제기했다. “여풍이라고라? 아직 멀었습니다. 우리 사회 주요 권력과 요직은 여전히 남성들 차지고, 여성의 성공을 가로막는 장애 요인이 얼마나 많은데요. 위 아 스틸 헝그리(We are still hungry)입니다.” 이날 편집국 기자들은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로 나뉘어 한바탕 ‘설전’을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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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에서 ‘알파걸’이니 ‘여풍당당’이니 하며 호들갑을 떨 만큼 최근 몇 년 새 여성의 약진이 두드러져 보인 것은 사실이다. 지난 10년 동안 여성의 주요 고시 합격자 비율은 4~6배까지 늘었다. 정치, 언론, 기업 및 학계를 막론하고 여성 리더의 비율도 증가하고 있다. 지난해 봄 <여성 리더계층의 부상과 전망>이라는 보고서를 낸 삼성경제연구소는 “리더가 되기 위해 거쳐야 할 ‘파이프라인’에 여성의 진입이 크게 늘고 있어 여성 리더 계층의 확대 속도가 더욱 빨라질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2012년이면 여성 리더 비율이 서구 선진국 수준은 아니어도 동구권과 일부 중남미 국가를 추월할 것으로 예상했다. 

최근 촛불 정국에서도 여성의 활약은 눈부셨다. ‘여성이 밝힌 촛불’이라는 표현대로, 촛불집회 점화부터 주요 고비마다 여성이 주도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5월2일 첫 촛불집회 때는 10대 여학생이 70%를 차지했고, 그 뒤를 이어 유모차 부대가 등장했다. 이어 82쿡닷컴, 마이클럽, 소울드레서처럼 여성 회원 중심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던 여성들이 촛불집회에 쏟아져 나와 힘을 불어넣었다. 이런 현상을 놓고 학자들은 일상의 삶에 가까이 서 있는 여성이 목소리를 낸 ‘생활 정치’의 등장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히려 제도권 내에서 여성의 지위와 권력이 취약하기 때문에 촛불을 든 여성이 더 부각된 측면이 있다.

한국 여성 평균소득은 남성의 46%

까놓고 이야기하자면, 한국은 아직 멀었다.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 한국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여전히 꼴찌 수준이다. UN이 2년마다 발표하는 여성권한척도(Gender Empowerment Measure) 조사에서 한국은 전체 조사 대상 75개국 가운데 53위를 차지했다(2006년). 국회의원 행정관리직 전문기술직 여성 비율에서 OECD 평균치보다 떨어지는 것은 물론 평균 소득에서도 형편없다. 한국 남성 평균 소득 대비 한국 여성의 평균 소득은 46%로 OECD 27개국 평균치(59.3%)보다 한참 떨어진다. 일하는 여성 대다수가 고부가가치 직종이나 직위보다는 경력 개발과 승진이 제한된 특수한 직무·직군에 갇히거나 비정규직 일자리를 전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 여성의 학력이나 실력이 형편없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한국 여성의 실력은 세계적으로 비교해도 우수한 편이다. 인적자원의 수준을 나타내는 여성개발지수(Gender-Related Development Index)를 놓고 볼 때, 한국 여성은 136개국 중 25위로 ‘우수 국가’로 분류된다. 여성개발지수는 여성의 기대수명, 문자가독률, 취학률 등을 기준으로 평가한다. 한국 남성과 비교해도 처지지 않는다. 교원 임용고사에서 상위 성적을 여성들이 독차지해 남자 교사를 뽑기 위해 오히려 ‘역차별’하는 사례가 대표 증거다. 성적순으로만 뽑는다면 여성이 더 많이 채용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기업체 인사 담당자들의 한결같은 이야기다. 한 공기업 인사담당자는 “성적만 놓고 보면, 신입사원을 100% 여성으로 채용해야 할 정도다”라고 털어놓았다. <시사IN>과 커리어케어가 국내 기업 여성 간부 104명을 조사한 결과에서도 남성보다 여성이 일을 더 잘하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남성과 여성 중 어느 쪽이 일을 더 잘한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다수 응답자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고 답했지만, 여성이라고 응답한 이가 남성이라고 답한 사람보다 61%나 많았다.

한국 여성이 처지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서 여성 리더가 부상하는 분야는 제한돼 있다. 고시나 자격증 취득처럼 ‘성적순’으로 진입할 수 있는 직종이나 정치 분야처럼 여성할당제가 적용되는 곳뿐이다. 그 외 분야에서는 여전히 두꺼운 ‘유리 천장(여성에 대한 보이지 않는 차별)’이 여성의 부상을 가로막는다. 가장 대표적인 분야가 경제 분야다. 국내 대기업 임원 가운데 여성 비율은 2007년 현재 4.4%에 불과하고, 코스닥 기업 가운데 여성이 CEO인 기업은 0.93%에 지나지 않는다. 5인 이상 사업체의 과장급 이상 여성 관리직 비율도 7.3%(남성은 92.7%) 수준이다.

'가슴 달린 남자'라여 성공한다?

<시사IN>의 이번 조사에서도, 경제계에 구축된 유리 천장이 드러났다. 조사 대상 여성 간부 가운데 여성이라는 이유로 실적에 대한 평가나 급여에서 차별을 받은 이가 꽤 많았다. 10명 중 4명(41.3%)은 차별을 받았다고 응답했고, 8.7%는 모르겠다고 답했다. 여성에 대한 차별은 외국계 기업(37.5%)이나 대기업(37.5%)보다 중소중견 기업(47.5%)이 더 심했다. 차별을 당하는 이들은 남성 동료에 비해 평균 3~5년가량 승진이 늦었고, 한 대기업 간부는 12년 이상 손해를 봤다고 답했다. 이들 대다수는 남성 간부와 마찬가지로 가정보다는 일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집중했는데도 여자라는 이유로 불이익을 당했다. 가정과 일의 집중도를 나눠보라는 질문에 응답자 2명 중 1명(49%)은 ‘가정 20% 대 직장 80%’라고 답했다. 직장보다 가정에 더 집중하는 여성은 10명 중 1명꼴(13.5%)이었다. 

여성의 사회적 성공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역시 남성 중심의 조직 문화와 육아?가사다. 직장 생활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문제가 무엇인지 두 개만 선택하라는 질문에 남성 중심의 조직 문화를 꼽은 여성이 가장 많았다(42명). 육아와 가사(37명), 업무 과다(33명)라고 답한 여성도 적지 않았다. 커리어케어 경영기획실 임현선 부장은 “이직을 희망하는 여성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한국 기업에는 아직도 남성 중심 조직 문화가 뿌리 깊이 박혀 있는 것을 느낀다”라고 말했다. 예컨대 여직원에게는 성과를 낼 수 있는 일을 주지 않는 남자 상사, ‘여자라서 그래?’ ‘여자가 무슨~’ 이런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남자가 아직까지 있다는 것이다. ‘퇴근 후 정치’가 인사고과의 중요한 평가 기준으로 작용하는 조직 문화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임 부장은 “이런 조직에서는 여성들이 승진 기회를 잡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버티는 것조차 힘들 수 있다”라고 덧붙였다.

남성 중심 조직 문화가 만들어놓은 유리 천장을 극복하기 위해 이들이 선택한 방법은 무엇일까. ‘가슴 달린 남자’가 되든지 여성으로서 장점을 최대한 살리는 두 가지 선택지 중에 골라잡은 이들이 가장 많았다. 여성 간부들은 남성 동료처럼 조직 생활을 하거나(34.9%) 남성 동료보다 더 남성적으로 조직 생활을 했다(4.7%). 나머지 절반은 여성으로서의 장점을 극대화하거나(34.9%) 학위나 자격증 등을 따는 우회 전술(11.6%)을 택했다.

여성이 일하는 데 부모나 친·인척의 도움은 가장 든든한 자산이다. 육아와 가사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는 질문에 ‘부모나 친·인척의 도움을 받았다’고 응답한 이가 40.3%였다. 육아와 가사에 대한 부부 분담 문화는 이들 가정에서도 정착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육아와 가사를 남편과 분담한다고 응답한 이는 겨우 1%에 불과했다. 전문 도우미나 보육시설을 이용하는 경우(17.3%)보다 현저히 적었다.  

리더십과 정치력에서 취약한 여성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능력과 의욕을 갖춘 여성 리더가 사회나 조직에서 성장하려면 세 가지 장애물을 뛰어넘어야 한다. 교육 장애물, 계속근무 장애물, 리더역량 장애물이 그것이다. 한국의 경우 여성의 고학력화로 첫 번째 장애물은 이미 극복된 상태다. 그러나 계속근무 장애물과 리더역량 장애물은 리더가 될 여성의 발목을 잡는 요인으로 여전히 작용한다.

인테리어 회사 디자인 실장으로 일하던 김지영씨(38)는 육아 때문에 올해 초 회사를 그만두었다. 김씨는 “직업 특성상 야근이 많은데,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이의 뒷바라지를 제대로 할 수 없어 일을 그만두었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큰 뒤에나 다시 시작해볼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김씨처럼 고학력 여성이 일과 가정을 병행하지 못해 경제활동을 포기하는 사례는 꽤 많다. 육아와 가사에 대한 여성 부담이 줄지 않는 한 계속근무 장애물은 여성 리더의 부상을 가로막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여성 간부들은 육아시설과 공교육 시스템이 지금보다 강화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성이 사회적으로 성공하기 위해 꼭 필요한 제도적 장치가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에 가장 많은 응답자가 육아시설(54명)과 공교육 강화(45명), 탄력근무제(35명) 등을 꼽았다.   

여성이 리더로 부상하려면 리더역량 장애물도 극복해야 한다. 사회 네트워크를 쌓는 정치력을 보강하고 리더십을 계발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 그러나 이번 조사 결과 여성 간부들은 아직까지 리더십과 네트워크 면에서 취약한 것으로 드러났다. 설문에 응한 여성 간부 대다수는 조직에서 승진하려면 전문성과 리더십은 물론 친화력과 줄서기를 포함한 네트워크 및 경영자 의지가 고루 중요하다고 인식하고 있다. 여러 요소가 적절히 필요하다. ‘당위성’과 달리 실제 본인들의 승진에는 네트워크 능력 같은 상대평가의 영역보다 ‘전문성’같은 절대평가의 영역이 더 많이 작용했다는 것이 이들의 평가다. ‘당신의 승진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전문성(66명)과 친화력(32명)이라고 답한 응답자가 일반적인 승진 요건에서 전문성(63명)과 친화력(25명)을 꼽은 응답자보다 많았다. 이 여성들이 승진하는 데 약점으로 작용한 것은 리더십과 줄서기를 포함한 네트워크 능력이었다. 간부로서의 일반적인 승진 요건으로 리더십(58명)과 네트워크(22명)를 뽑은 여성보다 자신의 승진에 기여한 조건으로 리더십(40명)과 네트워크(14명)를 꼽은 여성이 훨씬 적었다.

외국계 반도체 기업 프리스케일의 재무팀 홍달원 부장(35)은 전문성을 먼저 키운 뒤 네트워크와 리더십을 갖춰 성공한 경우다. 첫 직장에서는 남자 상사가 전문적인 일은 주지 않고 허드렛일만 던져주곤 했다. 그녀는 그런 상사 밑에서는 전망이 없다고 판단해, 회계 분야를 집중해서 공부한 뒤 회계 전문 직원으로 일할 수 있는 직장으로 옮겼다. 그 직장에서 상사가 갑자기 그만두는 바람에 어린 나이에 재무팀을 도맡게 되었다. 그녀는 ‘위기보다는 기회다’ 싶은 마음에 새벽 두세 시까지 회사에 남아 일을 해냈다. 그 때 ‘올인’한 덕에 그녀는 리더로 올라서는 발판을 마련했다. 홍 부장은 “주어진 일만 기다렸다가는 승진 기회를 잡기가 어렵다. 어느 조직이나 정치싸움이 있기 마련이어서 내가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억울하게 당할 수 있다. 전문성은 기본이고, 조직 내 정치싸움에서 스스로 보호할 수 있도록 정치력도 키워야 한다. 아울러 작은 조직을 맡을 때부터 리더십을 키우는 노력을 해야 한다”라고 귀띔했다.

"자녀 세대에나 남녀평등 완성"

성공 경험이 있기 때문인지, 이번 조사 대상자의 상당수는 조직의 최고 리더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 ‘당신 회사에서 임원으로 승진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사장이나 임원이 아닌 여성 10명 가운데 6명가량(63.2%)이 승진할 수 있다고 답했다. 현재 직위와 업무에 대한 만족도도 높은 편이었다. 응답자의 75%가 만족한다고 답했다. 불만족스럽다고 답한 응답자(25%)는 연봉 수준이 낮거나 승진 가능성이 적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혔다.

자신들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는 희망을 품고 있지만, 한국 사회 전체 여성의 미래에 대해서는 다소 부정적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주요 의사결정 주체의 절반이 될 수 있는 날이 언제 오겠냐’는 질문에 10년 안에 가능하다고 답한 이는 10명 중 3명꼴(36.5%)이었다. 응답자 절반 이상(52.9%)은 자녀 세대 때나 가능하다고 응답했고, 10명 중 1명(9.6%)은 영원히 불가능하다고 전망했다. 자신은 어렵게 성공신화를 일궜지만 한국 사회에 뿌리 깊은 남성 중심의 조직 문화와 유리 천장이 사회 전체에서 사라지기란 쉽지 않으리라고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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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23 10:40

"1.5배 더 해야 남자만큼 인정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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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전자 조은숙 상무




현대차그룹이나 포스코처럼 여성 임원이 한 명도 없는 대기업이 많으니, 대기업 여성 임원이라면 ‘희귀종’ 취급을 당한다. LG전자 MC연구소 조은숙 상무(44)가 처음 임원으로 승진하던 2006년에도 그랬다. LG그룹 전체 임원 750여 명 가운데 여성 임원은 총 12명.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임원까지 오른 여성은 손에 꼽을 정도여서 조 상무의 승진은 화젯거리였다. 그녀를 만나 대기업 여성 임원의 속사정을 들어봤다.

입사 18년 만에 임원이 되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차별받은 적은 없나?
연구소의 첫 여직원으로 입사한 탓에 초기부터 ‘싸움닭’처럼 살았다. 연구원으로 들어온 내게 행정직이 입는 유니폼을 입으라고 해 싸웠고, 여자를 달가워하지 않는 첫 상사가 함께 입사한 남자 연구원과 차별해 싸우기도 했다. 그 뒤로는 별로 차별받지 않았다. LG그룹은 남녀평등 문화가 정착된 편이고, 경영자가 여성 인재에 대해 열린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 물론 여자를 달가워하지 않는 남자 상사도 여전히 있다. 최근에도 박사학위를 받고 입사한 여직원에게 몇 달 동안 허드렛일만 시키는 남자 상사가 있어서 그 여직원의 부서를 옮겨주었다. 20년 전과 달라진 게 없는 건가 싶기도 하다.

조직에서 성공한 여성에게 흔히 붙는 별명이 ‘가슴 달린 여자’라는 표현이다.
나도 많이 들었다. 굳이 남성화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남성 동료와 다름없이 생활하니까 그렇게 보였던 것 같다.

일도 남성 동료만큼 했나?
여자가 남자만큼 일하면 전혀 두각을 나타낼 수 없다. 남자보다 더 많이, 더 잘해야 남자만큼 인정받는다. 남성 동료보다 늘 1.5배 이상 일했다. 여자는 입사 때부터 남자보다 치열한 경쟁을 치르기 때문에 대체로 우수한 인력이 직원으로 채용된다. 조직에서 성공할 가능성도 높다. 그런데 오히려 요즘 여자 후배들은 남자만큼만 일한다. 남자보다 더 치열하고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여자 후배들에게 잔소리하는 편이다.

남자 직원과의 관계 설정에 어려움은 없나?
처음에는 스트레스를 좀 받았다. 여자 상사라서 ‘말빨’이 안 먹히는 경향도 있다. 술도 많이 먹고 밥값도 많이 들었다. 이제는 여자 상사라서 아랫사람을 설득하는 데 더 유리하다. 내가 어떤 제안을 하면 거부감을 갖기보다 권고와 충고로 받아들이는 직원이 많다.   

육아와 가사노동은 어떻게 해결했나?
친정과 시댁을 오가며 아이들을 맡기다 지금은 육아 도우미의 도움을 받고 있다. 남편이 육아에 적극적이어서 부담이 적은 편이다.  

LG전자에서 사장 자리까지 오를 수 있을까?
연구소장까지는 바라볼 수 있겠지만, 그룹 분위기상 여성 사장이 나오기까지는 시간이 더 걸리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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